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산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918년 [[왕건]]이 [[역성혁명]]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서로 사신을 왕래하는 등 고려와 후백제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낸다. 견훤은 숙원이었던 신라 공략에 매진하기 위해 고려 쪽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고, 이는 건국 초기 온갖 반란으로 혼란스럽던 고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환선길의 난, 이흔암의 난, 명주의 대호족 김순식의 반기, 공직의 배신, 청주 호족들의 소요, 웅주(옛 [[웅진#s-1]]) 일대 호족들의 대거 이탈 등 고려는 수많은 장수들이 죽거나 이탈하고, 영토는 거의 반토막이 난다. 하지만 견훤이 내란으로 소란스럽던 고려를 치지 않은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왕건 초기 혼란상 와중에 견훤은 [[대야성]]([[합천군]])을 거의 15년에 달하는 후백제의 꼬라박음 끝에 신라한테서 대야성을 완전히 빼앗고, [[충청도]]-[[경상북도]] 쪽으로는 [[문경새재]] 일대를 손에 넣었다. 대야성과 문경새재 모두 [[서라벌]](경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데다, 문경새재 일대는 '''견훤의 고향'''(당시 상주 가은현, 2022년 기준 [[문경시]] 가은읍)이었기에 견훤은 왕건의 혼란상을 틈타 정치적, 군사적, 가문(개인적)의 이득을 크게 봤다.] 하지만 왕건과 견훤 모두 삼한 통일의 야망을 가진 군웅들이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난다. 특히 신라를 적대시한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신라]]와의 화친 정책을 폈고, 이는 신라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견훤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왕건과 견훤의 첫 대결은 두 번에 걸친 [[조물성 전투]]로,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고려가 끝끝내 성을 지켜내어 승패가 명확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일단 왕건과 견훤은 [[왕신|인질을]] [[진호#s-1.3|교환하고]] 강화에 동의하지만, 후백제의 인질인 진호가 1년만에 병으로 숨지자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주살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치부하여 왕신을 죽여버리고 강화를 파기한다. 이에 분노한 왕건은 신라와 연합하여 견훤에 맞서 싸운다. 견훤의 군대가 웅진으로 치고나오자, 고려와 신라군은 웅진과 문경 인근에서 후백제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때 고려의 장군 영창과 [[능식]]이 '''한반도를 반바퀴 돌아''' [[강주]]에 상륙, 마을 4곳을 함락시켰고 [[김락]]이 견훤이 수 차례 공격 끝에 간신히 점령한 대야성을 탈환하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를 사로잡는다. 이 기동으로 인해, 견훤은 어느 통로로 진격해도 고려군의 협공을 받게 되는 형세에 빠지게 되었다. 왕건은 내친김에 직접 진주까지 남하해서 백성들을 위무하자 문경 일대의 호족들도 고려에게 투항하면서 견훤은 전략적으로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